1. #1.

    두 달에 한 번쯤은 헛간을 태웁니다. 그가 말했다. 그리고 또 손가락을 꺾었다. 그 정도 페이스가 가장 좋은 것 같습니다. 물론 제게는 말입니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은 때때로 한번씩 생각이 나서 다시 찾게 된다. 일요일에서 월요일로 넘어가는 새벽에 오랫만에 하루키의 원작 단편을 폈다. 단편소설의 느낌도 좋지만 영화가 그보다 더 좋은 이유의 반 할 이상은 스티븐 연의 대사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예의바르고 진중하면서도 드러나지 않게 오만한 그의 일부분에 자신을 투영하게 된다.


    #2.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상하게도 슬픈 감정이 들지 않았다. 존경하는 할아버지임에도, 이제 다시 뵐 수 없음을 알지만 삶의 한 챕터를 잘 마무리하고 넘어간 것처럼 내게는 알 수 없는 다행이라는 생각이 더 들었던 것 같다. 당신께서 생전에 바라시던 소원을 들어드릴 수 있어서, 할아버지의 말씀들이 코멘트로 남아 있어서, 그리고 할아버지의 글들이 책으로 남아 추억할 수 있기에 아쉬움이 적을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안실에서의 마지막은 늘 어렵다.

    훗날 세상을 떠나기 전 자신 또한 뭔가 남기고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견고해졌다.


    #3.

    모두가 창작자가 되어야 할 필요는 없지만 무언가를 만들고 싶은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의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2. 첫 회사를 퇴사하고 두 번째 회사에 출근하는 첫 날이었다. 학창 시절에도 전학 한번 가 본적 없던 내겐 이직 역시도 처음이었기에 모든 게 낯설기만 했다. 경력직 직원으로서의 처음. 신입생으로 학교에 입학했던 것처럼 모두가 친하고 나 홀로 새로운 환경에 떨어져 들어온 느낌.

    앞번 회사에서 이직하시는 분들을 통해 익히 보아 왔듯 나도 새 회사의 첫 출근에는 정장을 챙겨 입었었다. 하지만 내가 옮겨간 곳은 180도 다른 분위기의 회사였던 것이다. 첫 날 점심시간 사내 카페에서 정장을 입은 직원은 나 혼자뿐이었다. 마치 나만이 물과 기름처럼 그 곳에 어울리지 못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생경한 충격이었다. 검은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젊은 대표님은 “내일부턴 그렇게 안 입으실거죠?” 라고 물었다. 

    그렇게 일 년 조금 넘게 청바지와 편한 복장으로 직장 생활을 했다. 그 동안 체중도 많이 늘어 전에 입던 수트는 입고 싶어도 입지 못한다. 사실 내가 이직을 결심한 소소한 이유 중의 하나도 그런 것이었다. 반드시 총무팀이 따로 있는 회사를 찾을 것. 야근이 잦지 않을 것. 아이티 업계. 또래의 젊은 동료가 많이 있었으면 했던 것. 하지만 모든 조건이 충족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 지는 건 아니라는 걸 또 한번 배웠다.

    지지난 주 다시 새로운 곳에서의 팀장님은 내게 물었다. 나의 표정의 변화가 없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그러니 다른 의견이 있으면 때때로 말해달라. 이십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표정이 풍부한 것이 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회사 생활을 하면서 의도적으로 그리고 타의적으로 감정을 얼굴에서 거둬들이는 훈련을 했다. 적어도 사회 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속내가 곧바로 드러나지 않는 편이 조금 더 편했다. 더러 산전수전을 다 겪은 것 같다는 칭찬 아닌 칭찬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반 의도적이고 반 타의적인 포커페이스를 들키고 난 속마음은 쓴 연기를 연거푸 들이킨 뒤의 헛헛함이었다. 어쩐지 언제부턴가 표정이 다양한 친구들이 보기 좋더라. 

     


  3. Every day is exactly the same

    주말엔 종종 홀로 카페에 나와 멍하니 앉아 시간을 보낸다. INFJ 와 ENFJ 사이 어딘가형 인간에게 중요한 유유자적한 시간. 생각과 일정을 정리할 시간을 일부러 갖지 않으면 일주일 내내 생각이 꼬여 엉망인 듯한 기분으로 지내게 된다. 

    주말 카페의 백미라면 소개팅 하는 커플의 대화 엿듣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옆 자리 소개팅 커플의 이야기는 이목을 잡아끈다. 대화와 옷차림, 표정 등의 몇가지 단서로 그들의 감정과 앞날을 상상해 본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에도 변주는 있다. 옷 매무새, 헤어스타일, 양말 색깔, 그날 출근길에 듣는 음악. 인생 전반의 화두인 정체되어 있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고민하며. 

    하루하루가 지루해지지 않기 위해 일상에서 조금씩 달라지는 부분들을 찾아 변주를 이뤄본다.

     


  4. Tell me it’s alright

    한동안 만나지 않고, 연락도 없었다. 이제는 오랫만에 만나 그간의 안부를 물어야만 하는 중학교 동창처럼, 린킨 파크는 내겐 한 시절의 상징과 같은 아티스트였고 불타올랐던 것은 조용히 사그라드는 것처럼 조금씩 밴드의 음악적 방향과 나의 취향이 달라지며 잊고 있던 이름이었다.

    나이가 들면 더이상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고 했나. 여전히 새로운 음악도 찾아 들으려 노력하지만 조금씩 예전에 즐겨듣는 음악들을 꺼내 듣고 있다. 작년 이맘쯤은 데프톤즈를 들었기도 했고, 얼마 전에는 린킨 파크 1집을 다시 들었다. 이 앨범을 들으면 늘 그 시절 생각이 난다.
    중학교 2학년에서 3학년으로 넘어가는 무렵이었을 것이다. 테이프였다면 닳고 닳을 정도로 이 음반을 틀었다. 그 때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도 좋은 걸까, 아니면 그저 좋은 음악이어서 좋은 걸까. 함께 이 음악을 듣던 친구들과 밴드 멤버들, 그 때만의 천진함과 소소한 낭만이 떠오른다. 

    보컬 체스터 베닝턴의 죽음을 기사로 접하고 멍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땐 소원해졌던 린킨 파크의 신보를 한동안 듣고 있던 때였다. ‘Nobody can save me’라는 제목이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을 떠났던 걸까. 쉽지 않은 여정이었겠지만 당신의 음악으로 위안을 얻었던 친구들이 많다는 것이 그 곳에서도 위로가 되기를.

    체스터를 추모하며.


    Tell me it’s alright Tell me I’m forgiven, tonight
    And only I can save me now
    I’m holding up a light Chasing out the darkness inside
    And I don’t wanna let you down
    But only I can save me.

     


  5.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수 백장의 사진 중 개인적인 몇 컷.

     


  6. 나에겐 큰 의미를 지녔던 것들이 한순간 덧없어지기도 하고, 삶의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했다.

     


  7. 3년만이다. 술을 마시고 나서, 당 떨어질때, 그냥 기분이 좀 좋아지고 싶을 때. 으레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다. 전 회사에 다닐 때는 배스킨라빈스에 갈 일이 없었다. 배신이라고 생각했다기보단 회사 냉장고에서 하나씩 꺼내 먹는 게, 그리고 선물을 했을 때에 사람들의 환한 표정을 보는게 그냥 좋았다. 3년하고도 몇 달이 지나 배스킨라빈스를 찾았다. 그냥 여러 가지 맛이 섞인, 처음엔 여러 플레이버들을 골라 먹지만 시간이 지나면 녹아서 한데 섞여버린, 새콤달콤해진 아이스크림을 먹게 되는 그간 잊어버린 경험이 그리웠기 때문이다.

    내 손이 닿는걸 바꾸는 것은 어렵진 않다. 하지만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바꾸는 것은 만만치 않다. 아니 어떤 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필연적이라서 그걸 받아들이고 수긍하며 살아야 한다. 불교에선 그런 걸 업이라고 할까. 싸워보기도 하고 멀어져 떨어뜨려 놓으려고도 해 보지만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고 만다. 나는 가족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나는 애초에 운명론자가 아니었는데 작년부터 지금까지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어쩌면 운명이 존재한다는 것에 일정 부분 수긍하게 된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과제들을 이겨나갈 운명을 지고 태어난 것이다. 피해갈 수 없다. 이게 결국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많은 것들이 나의 의지와 관련 없이 이루어져 간다. 이게 결국 운명이었던 것이다. 많은 일들이 실제 나의 내면을 개의치 않고, 상황에 맞는 어른이 되기를 강요 내지는 요구하고 있다. 나는, 일단은 충실히 그 요구에 따르고자 한다. 하지만 그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충분히 어른스럽지 못한 내 자아는? 다들 그렇게 살아가고 있겠지. 이제 내 속이 타 들어가더라도 나 이외의 사람들을 위로하며 살아가야 한다. 그게 싫다는 게 아니라. 그냥 그 문장 그대로 건조하게 그래야만 한다고.

    스스로 자신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했던 지난 날들에 대해 후회는 하나도 없다. 덕분에 손쉽게 어른인 척 할 수 있었으니까. 하나씩 계단을 밟아가며 올라가고 있다. 그렇지만 가끔씩은, 속 안에 있는 것을 혼자 털어내려 이렇게 긴 문장을 적어 본다.

     


  8.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image

    아이슬란드에서 돌아온 지 벌써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 여유롭고 행복했지만 다소는 초조하기도 했던 날들이었다. 삶의 중간에 그런 몇 달간의 공백이 존재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위안이 되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다시 이 텅 빈 시기를 생각하며 나아가겠지. 다시 일을 시작한 지 한 달이 되어 간다.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에도 의미 있는 변화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사람은 끊임없이 해보지 않은 것들에 대한 변화를 순응하게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9. 블로그 도메인이 내년 2월에 만기라는 메일을 받고 연장하러 사이트에 들어갔다. 얼마나 연장하지? 1년? 2년? 고민하다 3년을 선택하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이제 적어도 3년 동안은 이 문제에 대해서만큼은 잊어도 된다.

    2018년은 많은 버킷리스트들을 클리어한 한 해였다 -퇴사를 포함하여-. 오키나와 가족여행, 츄라우미 수족관, 라이카 카메라, 줄자 타투, 작곡 레슨, 아나운서 아카데미, 탱고, 아이슬란드, 오로라.

    그리고 멘사 테스트와 사진 공모전에도 도전했었다. 돌이켜보니 한 해동안 이렇게 많은 것들을 할 수 있었다. 요즘은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려고 지난 3년간 개고생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충분히 자고 사색하고 시간을 즐긴다.

     

  10. 2주라는 기간은 많은 것들을 잊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내 차로 운전하는 법, 단어들, 문맥, 말하는 법, 도로와 길들.
    낯설게 느껴졌고 또다시 이곳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느낌이었다.

     

  11. Northern Lights,

     


  12. 20151102-20181025

    만 3년 꽉 채운 퇴사. 내 책상 위 한가득이던 개인 물품은 쇼핑백 두 개에 전부 담겼다. 겨우 이 정도뿐이었던 것을. 그리고 다음 주엔 드디어 아이슬란드에 간다…!

     

  13. 비가 억수로 많이 오는 날이었다. 도망치듯 퇴근하는 길엔 모든 차들이 비상등을 켜고 느리게 느리게 달렸다. C조 악기를 판매하러 가는 길이었다. Bb 악기만큼 자주 쓰이지 않기에 장터에 올려둔지 한참 되었지만 드문드문 연락이 올 뿐이었다. 차에서 내려 카페로 걷는 몇 걸음만에 신발까지 다 젖었다.
    악기의 새 주인이 될 분은 군악대 부사관이었다. 짧은 대화 속에서 나의 군시절 낯익은 부사관들 이름도 오랫만에 상기할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아쉬움보다 더 자주, 멋지게 연주해줄 수 있는 사람에게로 가 제 역할을 다 할 것이라는 묘한 안도감이 들었다.
    스물 아홉에서 삼십으로 넘어가는 십이월 겨울, 몸에 트럼펫과 미러볼을 새겼었다. 그럴 듯한 어른이 되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천천히 천천히 나아가는 중.

     


  14. - 출근길에 강변북로 오른쪽 너머로 보이는 한강을 보며 이런 상상을 해. 아 오늘처럼 볕 좋은 날에 저기 강변 어디에 앉아 강물에 햇빛이 반사되어 반짝이는 걸 바라보고 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 당장 내 몸은 저기에 가 있을 순 없지만, 그래도 맘만 먹으면 언젠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희망. 서울에 사는 건 그게 좋다. 서울 어디에선가 남산 타워가 보이면 이 세계가 별 일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안도감이 들어서.

    - 수면제를 몇 알 처방 받으러 병원에 갔다. 왜 잠을 잘 못자냐는 물음에 밤에 생각이 많아지다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어 괴롭다고 답했다. 스트레스야 직장인이면 누구나 받는 건데 그게 별 거냐며. 나이 지긋한 의사 선생님은 처방과 함께 자신이 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며 메일로 파일을 보내주셨다. 책은 의외로 사랑과 연애에 관한 에세이였다. 그렇게 요즘은 97년에 쓰여진 연애 에세이를 읽고 있다. 연애 이야기는 한 마디도 안했는데 왜 내게 이 책을 보내주신 걸까.

    - 버닝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는 유아인도, 전종서도 아닌 스티븐 연이었다. 어떤 부분이 어느 형태로 나와 닮아 있는지 유심히 관찰하며 감상했다. 나 아닌 타인의 손을 빌어 누군가 나를 끝장내 주길 바라는 듯한 결말까지도 완벽했다.

    - 열 시까지 납득이 되지 않는 일로 계속 야근을 하고, 나의 가치관과 내가 비중을 두고 하는 일에 대한 가치가 헛갈리기 시작하고. 오늘 퇴근하며 1812년 서곡을 아주 큰 볼륨으로 먼저 듣고 이어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5번 2악장을 들었다. 가장 좋아하는 심포니 중 하나인데 운 좋게도 몇 번이나 연주할 기회가 있었다. 확실히 오케 연습을 하면서, 그리고 무대에서 연주하면서 점점 더 이 곡이 좋아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음악을 듣는 것보단 직접 연주하면서 들려지는 것이 더 좋다. 마지막 부분에 갑자기 눈물이 울컥 튀어나와 주차장에서 시동을 끄고 한참 흐느꼈다. 작곡가가 이 부분을 쓰며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차이코프스키는 한 시대 후에 누군가 이 곡을 들으며 눈물을 흘려줄 걸 알았을까. 

     

  15. 한 달 동안 참 열심히도 들었다.